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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 1


13살 어린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어줍잖은 어른으로서의 한소리.

13살이라고 해도 어차피 이제는 슬슬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건가?

2세와 15

12세와 25

22세와 35

32세와 45

42세와 55.....

띠동갑을 넘어서 동시에 같은 ~십대”, 같은 세대라고 묶일 수 없는 열몇살의 차이는 각기 한 중요한 시기를 거칠 때 마다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지금의 우리는 22세와 35. 10년 전엔, 초등학교 6학년생과 사회초년생의 차이로 길을 스쳐 지나가도 의식하지 않았을 그런 관계없는 관계였겠고, 앞으로 10년 후인 32세와 45세엔 지금 보다는 좀 더 당당하게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고 얘길 할 수 있는 관계일지도...아니 그런 말을 당당히 할 시기는 10년 정도 더 있고난 후 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의 42세는 아직 한창 때일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면 52세의 남자도 아직 한참의 남자이다. 도데체 나보다 어린 남자가 나랑 비슷한 처지라고 여겨질 때는 언제일 것일까? 정말 내가 생각해도 쌩뚱 맞는 생각만 하는게 나구나 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날 뿐이다. 에라, 술이나 다시 청해볼까.

 

누나, 말은 하다말고 술은 왜 또 따르세요?”

라며, 술병을 빼앗아 따라주는 이 아이, 술 마시는 나를 싫어하면서도 오버하며 술을 말리지 않는 모습에 매번 은근히 감동한다. 이래서 이 아이를 못 버리나 보다.

척아, 안 말려?”

제가 말려서, 제가 부탁하는 대로 안 마실 꺼라고 약속하면 말릴께요

에이, 성의상 말리는 척이라도 해보라는 거지...너 잘하잖아 뭐뭐 하는 척~”

못 하거든요~뭐라는 건지,..아까 하시던 말씀이나 계속하시던가요

에이 말 돌리는거 봐라

말 돌리는 건 누나잖아요

...그런가...난 별로 할 말이 없는데

거창하게 뭐 할말 있는 것처럼 불러놓고는...사람 실없는 건 도데체 어떻게 고치는건가요? 저 군대 가기 전에 누나 그건 고쳐놓고 가야겠다

그러면서 지 잔을 고개 돌려 반만 비운다.

군대 가기 전에 남 고칠 생각 말고 너 그 버르장머리부터 고쳐라 야~ 고개 돌려서 마시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그렇게 격식 차릴꺼면 아예 다 들이키던가, 정종 따라놓고 반잔씩 홀짝홀짝, 그게 뭐하는 거냐, 에스프레소 홀짝홀짝 마시는 무식한 동양인 같이

술잔마저 채워 넣으며 핀잔 한 마디 던져본다.

흐음. 누나랑 오래오래 얘기하면서 마실려고 그러는 거죠

야 나 장사해야하거든, 주인인 내가 너 상대로 밤새 마시면, 가게 오시는 손님들은 누가 챙기니

씨익 웃으며 내가 그세 비운 잔을 채워주는 이 아이. 아마, 오늘도 이 아이가 무료로 가게 일을 봐 줄 것이고, 나는 오늘도 단골들과 주거니 받거니 술로 밤을 밝힐 것이다. 이런 나쁜 버릇이 든 것은 저 아이가 여기에서 실제로 알바를 뛰기 시작하고서부터다. 사실 알바를 써야 할 정도로 가게가 정신없이 잘 되는 것이 아니였지만, 적적도 하고 역시 여자 혼자 하기엔 힘든, 몇몇 힘쓰는 일들이 간간히 있어 처음엔 주말 저녁에만 알바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2인용 카페테이블 5개에 바용 의자 3개 달랑 간신히 들어가는 좁은 가게에서 일본 정종 몇 가지와 국산 맥주를 병맥주로 냉장고 채워놓고 손님들이 알아서 가져가며 그때마다 계산하는, 주인으로서는 매우 편한 이 가게에 알바를 쓴다는 것은 정말 사치다. 거기다 가끔식 소문 듣고 신기한 곳 구경 오는 어쩌다의 손님 외에는 매일 와서 기본 안주에 맥주 한 두병 놓고 서너시간 죽치는 단골들만 있어, 가게는 한산했고, 매상은 기대 외 수입이었기에 알바를 쓰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애시당초 돈을 벌려고 하는 가게도 아니였고, 가게세 걱정없고 생활비 걱정없는 입장이었으므로, 준단골이었던 이 아이가 알바로 써달라고 했을 때에는, 그제껏 이런저런 힘쓰는 일 도와줬던 터라 고맙고 미안하기도 한 마음에 우선은 시범적으로 해보자고는 했었다. 그런데 일이 되려 이상하게 꼬여, 어느 새 주객전도되어, 내 가게에 손님보다 더 서비스 받아가며 매일 저녁 술주정을 부리게 된 것이다.

너 여기서 일한지도 벌써 5개월이 다 되어가네

어느 새 아이는 가게 열 준비로 바쁘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스러 한 마디 건넸는데, 의외로 성실한 대답이 나온다.

...여기 다니기 시작한지 7개월하고 6일이예요

별걸 다 세네...그럼 내일이 7땡이야?”

?...”

하던 일 멈추고 날 의아하게 쳐다보는 이 아이는 칠땡이니 팔땡이니 하는 말을 못 들어봤나보다. 하긴, 1990년에 태어난 아이에게 칠땡년생이거나, 팔땡학번 같은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 같다. , 팔땡학번이면 나에게도 꽤나 어려운 선배들 이야기이니까.

“7(),7()이냐고

......내일이 223일째

침침한 빛 아래 잘 보이지도 않는데, 약간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는건지 하던 일을 어설프게 서두르는 아이의 모습에 되려 무슨 기념일을 잊은 사람처럼 괜시리 미안해진다.

군대 가면 매일매일 날짜세고 있을 건데, 벌써부터 뭐하러 별스러운 날을 세니, 뭐 대단한 사건이라고

그냥,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는거죠

하루하루라...7개월 전 쯤, 처음 이 가게를 들어왔을 때 저 아이는 이곳의 하루하루가 의미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했을까? 나로서는 첫 날의 인상조차 흐릿한데, 어느 덧, 하루하루 이 아이의 존재는 날로 의미 있어져갔다. 굳이 날짜를 세지 않더라도, 커져만 가는 이 아이의 존재감으로, 날짜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니까.

오늘은 또 어떤 의미있는 날이 되려나...”

홀로 술잔 들이키며, 아까 하던 이야기를 오늘 안에 꼭 마저 하고 마리라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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